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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우리 사회에 제2의 매국노 이관용은 없는가?

우리 사회에 제 2의 이완용은 없는지?

매국노이완용은 나라만 팔아 먹었을뿐만아니라,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한다. 
경기도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 정동일씨는 “문헌에 의하면 이완용의 장남인 이승구는 당대의 절세미인
이었던 부인 임걸귀와 아버지 이완용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자살했으며 이완용의 호적에서도 제외됐던 불행한 인물”이라고밝혔다(연합뉴스, 2006. 8, 29). 며느리와 불륜관계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는 매국 하나만으로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자’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완용이 온양온천에 가서 병을 조리했는데 연도의 경호가 매우 심했다. 그는 과부가 된 며느리 임씨를 데리고 함께 갔다.”(李完用赴溫陽溫泉調病, 沿道警衛甚嚴. 携其寡媳任偕往)라고 했다(경술 융희 4년). 황현은 왜 이완용이 요양하러 가면서 “과부가 된 며느리 임씨를 데리고 함께 갔다”고 썼을까? 불륜을 암시한 것인가? 아무튼 묘한 뉴앙스를 풍기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완용(1858∼1926)은 우봉(牛峰) 이씨로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이호석(李鎬奭)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예방승지(禮房承旨) 이호준(李鎬俊)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1905년 학부대신으로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지원으로 일본군 무력시위를 이용하여 어전회의를 열고 고종을 협박, 11월 18일 을사늑약을 체결케 했다. 이로써 그는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이 된 최악의 매국노가 되었다.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고  통감(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이준 열사의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난 후, 이완용은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의 양위를 강요, 순종을 즉위시켰다. 당시 수만명의 군중들이 덕수궁으로 몰려가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규탄했고 그의 집은 군중들에 의해 불탔다. 그해 이등박문의 주도대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서명하고 순종의 재가를 받았으며 이로써 인사, 입법, 행정 등 주요 권한을 일본에 이양했다. 1909년 7월에는 이완용 단독으로 기유각서(己酉覺書)를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1909년 12월 22일 이완용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李在明) 의사(義士)의 칼을 맞았으나 목숨을 건졌다. 그는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으로 전권위원이 되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매국의 댓가로 훈(勳) 1등 백작(伯爵)과 잔무처리수당 60여원,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공채 15만원을 받았다. 1912년에는 중추원부의장이 되고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주장했다. 1919년 3·1운동을 비난하는 경고문과 담화를 3차례에 걸쳐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발표, 그 공로로 1920년 후작(侯爵)이 됐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조국을 팔아먹고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하는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69세로 더러운 삶을 마감했다. 그는 1905년 을사오적 이후 21년간 친일행위로 일관하다가 육신은 저 세상으로 갔지만 매국노의 오명(汚名)은 영원히 남아 있다. 

모레 15일은 광복 67주년이 되고, 28일은 조선이 멸망한지 102주년이 된다. 조국을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하는 패륜아 이완용. 우리는 그의 더럽고 추악한 삶을 잊어서는 된다. 선과 악이 모두 역사가 된다. 

우리 사회에 제2의 이완용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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