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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안중근열사와 이등박문과의 차이점

지금으로 부터 딱 107년 전!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사는 전날 밤 고향에서 어머니가 보내 온 명주옷을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와 교수대에 섰다

안중근의사는"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나는 그동안 조선 구한말 역사 글을 쓰면서 이완용, 송병준 친일민족반역매국노들을 위주로 그 시대를 정리하다 보니 안중근의사(이하 안중근)이야기는 조금 스쳐갔다. 

내가 쓰고있는 역사 글 순서상 안중근 의사 이야기는 송병준1편 다음에 나오면 시기 상으로 딱 맞다. 

그러나 오늘이 오늘이 안중근 순국일이니 만큼 한 편 앞 당겨 쓴다. 

사실, 역사는 시험을 보기 위한 암기과목이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 왜 일어났고 어떤 결과가 발생했으며 우리가 그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 앞으로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알아가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이다.

그러나 내 학창시절에 배운 역사는 그저 앞, 뒤 설명없이 아무런 의미도 뜻도 모르는 체 그저 무조건 암기 했을 뿐이었다.

얼마 전 아이돌 걸그룹 AOA의 설현과 지민이 케이블채널인 온스타일의 '채널 AOA’라는 프로그램에서 안중근 의사를 몰라 봤다고 해서 맹비난을 당한적이 있었다.

지민에게 제작진이 안중근 사진을 보이며 누구냐고 묻자 지민은 처음에 안창호 선생님이라고 했다가, 제작진이 이토 히로부미라고 힌트를 주자 ‘긴또깡’이라고 했고, 재차 이토 히로부미라는 힌트를 주자 ‘이또 호로모미?’라고 했으며, 설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검색하다가 안중근 의사라는 답을 겨우 찾아냈다.

이 걸그룹이 예능의 재미를 위해 일부러 그랬다는 말도 있다.

그랬든 어쩠든 우리 젊은 친구들의 역사지식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독립투사를 예능의 재미를 위해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 제작진들의 역사인식이 더 문제였다. 

사실, 아이돌 가수들이 역사지식이 그토록 무지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노래와 안무만이 전부인 세상을 살았고 치열한 경쟁 끝에 그 자리까지 왔다.

아마 일반 같은 나이 때 아이들 보다 훨씬 더 힘든 세상을 살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 누구도 그들에게 역사인식을 심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 학창시절 역사교육은 그저 무조건 암기식으로 하니 흥미도 가질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그녀들을 탓하기 보다는 최소한의 역사인식도 심어 주지 못한 우리 사회를 탓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우리나라 젊은사람들은 2월14일을 국적불명의 발렌타이데이라 하면서 연인들끼리 초코릿을 주고 받고 있다. 그러나 2월14일이 일제에 의해
안중근의사가 사형을 최종적으로 확정선고 받은 날이었는지는 전혀 모른다. 

최근에 와서야 Sns상에는 2월14일이 안중근 순국일로 알려지며 조금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도 잘못 알려져 있다. 사형집행일은 오늘 3월26일이 맞다.
2월14일은 안중근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던 날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안중근에 대해 제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안중근을 이야기하려면 이또히로부미를 빼놓고 지나칠 수는 없다. 

사실 이 두 사람은 서로 죽고 죽인 관계이지만 생각이 비슷한 점도 있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현재 각자 나라에서는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는 점도 같다.
그런데 또 각 국에서는 한 명은 침략자로 또 한 명은 테러리스트로 공인되어 있으니 나라에 따라 인물평가도 확연히 달라진다.

우선 안중근과 이또히로부미는 둘 다 '대동아공영론'을 부르짖었다. 뜻은 같다.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대응하기위해서는 동아시아 한.중.일 세 나라가 서로 뭉쳐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겉은 같은 말 같지만 속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안중근의 '대동아공영론'은 즉 '동양평화론'이라고도 부른다. 

'한중일 각 국가가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고 각자의 특색을 갖고 각기 역사적으로 의존 및 투쟁을 반복하면서 성장해왔다. 그러다 어느 한 쪽이 한 쪽을 지배하는 형상을 가졌을때는 한중일의 균형이 무너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또한 한 쪽의 힘이 증대되면 한쪽은 연합해 한 쪽을 견재하는 그런 저울같은 관계였다. 한중일 이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가지기 위해서는 한중일 누구도 외세에 영향 받지 않고 자존할 수 있게 힘의 균형을 가지면서 평화를 추구하자' 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영세중립국도 주장했다.

동양평화론은 사실 중국 손문이 먼저 시작했고 그 이념은 국민당(대만) 중화인민군(중국)의 건국 이념에도 들어가 있다.
 
이에 반해 일본 이또히로부미의 대동아공영론은 3국중 가장 먼저 근대화되어 일종의 문화적 우월감에 빠져 완전 일본 입장에서만 부르짖었다. 

이또의 논리는 '한중일은 오랜 세월간 서로의 각축전으로 얼룩져 왔다. 그리고 이 3국 중 항상 패권국인 중국이 3국을 주도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중국이 그 힘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그 위치를 누군가 대신해야 한다. 그리고 패권국이 3국을 평화로 이끌어야한다. 즉 중국은 한 물 갔으니 이제 일본이 이 3국을 주도해 나가겠다' 는 생각이었다.

이또가 이 대동아공영론을 주장 할 때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두 전쟁에서 일본의 완벽한 승리로 일본의 기세가 욱일승천하고 조선을 거의 손아귀에 넣고 있을 때였다.

조선을 먹고 중국도 곧 먹겠다는 일본의 수작이 눈에 훤히 보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때 일본에서 이또는 온건파였다. 

강경파 군부세력은 이또처럼 '논리적, 이론적으로 군불만 때며, 더 이상 시간끌지 말고 그냥 군사적 힘으로 조선을 합방하고 곧 바로 만주로 쳐들어 가자' 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또는 당시 실세 총리로서 이런 일본 군부 군국주의세력을 어느 정도 막아내고 있었다.

이또는 군사적 힘만 가지고는 조선과 중국을 영원히 속국으로 만들 수 없다고 보고 '대동아공영론'이라는 그럴싸한 더 큰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또의 생각이 일본군국주의자들 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무서운 계획이었다. 조선을 일시적 강탈이 아니라 조선의 정신까지 빼앗아 영원히 일본의 속국화 시키려했다

안중근은 그런 이또의 속셈을 간파했다. 

그리고 이또 암살을 결심하고 결행했다. 

당시 이또 암살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또가 중국 하얼빈에 온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거기서 내릴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중근은 이또의 얼굴도 몰랐다. 

나도 권총을 안 쏴봐서 모르지만 권총 전문가들은 5미터 앞에서도 권총으로 쏴서는 움직이는 물체를 맞추기 힘들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안중근은 10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가장 앞에 가는 사람이 이또라고 짐작하고 권총으로 정확하게 3발을 쏘아 맞춘다. 

또 혹이나 그가 이또가 아닐까봐 옆 수행원에게도 3발을 쏘아 정확히 맞추었다. 6발 중 단 한 발도 빗나가지 않았다.

안중근은 엄청난 역사적 사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리고 뛰어난 명사수이기도 했다.

실제인지는 잘모르겠지만 이또가 죽기 직전에 자기를 쏜 사람이 누구였냐고 물어서 조선인이라고 하자 
"빠가야로(바보같은자식!) "라고 했다고 한다.

이또는 자기가 제거되면 일본군부강경파가 곧 바로 무력으로 조선을 합방하리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안중근이 1909 년 음력 9월 13일 오전 9시( 양력 10월26일 )에 이또를 사살하고 나서 채 1년도 안된 1910년 8월에 한일합방이 조인되어 효력이 발생 되고 만다.

그러나 안중근의 이또 암살로 한일합방은 조금 앞 당겨졌을지는 모르지만 이또가 살아 있었으면 이또는 좀 더 교묘한 방법으로 조선을 옥죄여 갔을 것이다. 한일합방은 시간이나 방법이 문제였지 일본에게는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다. 이미 이또는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을 통하여 조선의 통치권을 완벽하게 가져 간 상태였기도 했다.

안중근의 의거가 없었다면 조선의 멸망은 더 초라하고 비참했을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치욕이 안중근으로인해 조금이나마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안중근은 거사 성공이후 행적은 더 빛났다.

일제에 의해 결과가 정해진 재판에 당당하게 임했다. 안중근은 '자기는 암살자가 아니라 조선의 장수로서 일본과 전쟁 중 적군 장수를 사살 했다' 라고 주장했다. 

안중근은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도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 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관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했다

안중근의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선고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이 날을 발렌타이데이라고 알고만 있다. 한심스런 일이다.

안중근은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공근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안중근 어머니가 죽음을 앞둔 안중근에게 보낸 편지 내용 또한 우리를 울린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어미는 현세에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안중근은 어머니 말처럼 항소를 포기하고 선고된 뒤 한 달이 조금 넘은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오늘같이 비가 촉촉히 왔는지는 모르겠다.

이처럼 안중근의 일생은 동양평화와 나라에 대한 애국심으로 뭉쳐있었다.

비록 안중근의 의로운 행동이 일본에 의해 테러리스트 암살자라는 이름으로 사형을 당했지만 일본인들도 인정할 만큼 안중근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항거했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장수로서 홀로 일본과의 전쟁을 치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중근은 우리 민족에 영원한 자부심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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