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탐지, 미세한 신체 반응 포착해 진술의 진위 판별
날로 기술적 진보…아직 법정 증거능력 인정은 못받아
"동생이 죽은 것 같아요."
올해 1월2일, 경찰에 변사사건 신고 한 건이 들어왔다. 서울 송파구의 한 원룸에서 2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이 원룸에 살던 A(29·여)씨의 언니는 연락이 되지 않아 원룸을 찾았다가 침대 밑에서 이불에 싸인 시신을 발견하고 신고했다. 시신에는 목 졸린 흔적이 있었다.
피의자 검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찰은 원룸 폐쇄회로(CC)TV에서 A씨가 작년 12월31일 오전 10시께 한 남성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고, 같은 날 오후 7시40분께 남성 혼자 원룸을 나가는 장면을 확인했다.
경찰은 이 남성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소재를 추적한 끝에 신고 접수 다음날 친구 집에 숨어 있던 박모(39)씨를 검거했다.
박씨는 범행을 순순히 털어놓는 듯 보였다. 그러나 경찰은 박씨 진술이 통 미덥지 않았다. 범행 동기가 너무 터무니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박씨 진술과 경찰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박씨는 사업에 실패한 뒤 친구가 운영하는 주점 종업원으로 일했다. 숨진 A씨는 주점을 종종 찾아오던 손님이었다.
작년 12월31일 새벽에도 A씨는 박씨가 일하는 주점에 왔다. 박씨는 A씨와 함께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A씨 집에까지 가게 됐다. 두 사람은 거기에서도 술을 마셨다. 여기까지는 경찰도 납득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박씨는 자신이 A씨를 목 졸라 살해한 사실까지는 인정했다. 그런데 살해 동기가 이상했다. A씨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중 A씨가 자신에게 "미국에 있는 남자친구가 만나주지 않아 힘들다. 날 죽여 달라"고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경찰은 전후 상황으로 미뤄 박씨가 A씨를 성폭행한 뒤 살해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뒀다. 박씨는 술을 마시다 A씨와 성관계는 했으나 합의로 한 행위였을 뿐 성폭행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 진술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박씨에게 적용되는 법 조항까지 달라져 형량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살인죄의 형량은 사형이나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징역형이다. 그러나 남의 부탁을 받아 살해하는 '촉탁살인'은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형으로 형량이 낮다. 박씨 진술대로라면 그는 촉탁살인을 한 셈이었다.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박씨를 수감한 경찰은 진술의 진위를 검증해보기로 했다. 경찰은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에 거짓말탐지(polygraph) 검사를 의뢰했다. 검사는 경찰에서 거짓말탐지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이재석 경위가 맡았다.
이 경위와 사전 면담에서 박씨는 매우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수염을 깎지 않아 다소 초췌했지만, 마른 체형에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지적인 느낌까지 풍겼다. 언변과 이해력도 좋았다. 영리하고 자기통제력이 강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이 경위는 박씨에게 '바이브라 이미지'(Vibra Image) 기법을 쓰기로 했다. 신체에 호흡이나 심박 측정기 등을 덕지덕지 붙이는 것이 아니라 특수 장비로 귀 안쪽 전정기관의 떨림을 감지, 이를 시각화해 거짓말을 가려내는 방식이다.
카메라 앞 검사 의자에 앉은 박씨는 침착한 태도로 검사에 응했다. 이 경위의 질문에도 차분히 답했다. 이 경위 역시 베테랑답게 여유를 갖고 그를 상대했다. 카메라와 연결된 모니터가 실시간 보여주는 박씨의 상태에는 특이점이 없었다.
이 경위가 결정적 질문을 던졌다. "강제로 성관계한 거죠?" 박씨는 "아니오"라고 답했다. 그러나 모니터에 나타난 박씨의 신체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분석 프로그램에 적색이 표시됐다. 거짓일 확률이 90%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검사가 끝났다. 이 경위는 박씨와 그를 데리고 온 형사에게 박씨의 신체 반응이 기록된 차트를 보여주며 결과를 설명했다. 박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찰서로 돌아간 그는 자신이 A씨를 성폭행한 뒤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 통제 불가능한 신체 반응에 '거짓말의 증거' 숨어 있어
거짓말탐지는 인간에 대해 두 가지를 전제해야 가능한 기법이다. 하나는 '성선설'이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고, 그 때문에 거짓을 꾸며내는 정신적 작용이 신체 반응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두 번째 전제는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신체 대부분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지만, 심박이나 체온처럼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데서 거짓말탐지는 출발한다.
거짓말탐지는 일반에 매우 잘 알려진 수사기법이지만, 흔히 생각하는 '단순명쾌'한 기법은 아니다. 탐지기가 검사 결과를 '진실' 또는 '거짓'으로 친절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탐지기는 피검사자의 신체 반응 변화를 차트로 보여줄 뿐이다.